인간 · SP-0020
저주
1/
저주…라는 건 말이야.
일반적인 악의로는 안 되는 거야.
2/
"어떻게 해버렸으면 좋겠다."
같은 마음으로
저주를 걸면 안 돼.
3/
벌을 주고 싶다거나,
망했으면 좋겠다거나,
결과를 바라는 순간,
4/
그건 그냥
분노지,
저주가 아니야.
5/
저주는
목적이 있으면 안 돼.
6/
단순히
저주받는 것,
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해.
7/
그래서
"저주를 걸어서 어떻게 하고 싶다."는 생각이 드는 순간,
저주는 의미를 잃어.
8/
의미를 잃은 저주는
방향을 잃는다.
9/
그리고
어디로 갈지 모른 채
가장 가까운 곳을 붙잡아.
10/
보통은
저주를 건
사람이다.
11/
처음엔
그냥 악몽인 줄 알았다.
12/
자취방에서 자고 있다가
새벽 3시쯤
눈이 떴다.
13/
답답해서 깼는데
방 안에 냄새가 났다.
습하고 퀴퀴한데,
어딘가 달았다.
14/
창문을 열면 사라졌다.
그래서
대수롭지 않게 넘겼다.
15/
다음 날도
같은 시간에 깼다.
같은 냄새.
16/
그다음 날도.
그다음 날도.
17/
일주일쯤 지나서
알아차렸다.
냄새에
방향이 있다는 걸.
18/
왼쪽이었다.
내 왼쪽.
침대 바로 옆.
19/
고개는 돌리지 않았다.
왜인지는 모르겠는데,
돌리면 안 된다는 걸
알고 있었다.
20/
이불을 뒤집어쓰고
아침까지 버티면
끝이었다.
21/
아홉째 밤.
단계가 올라갔다.
22/
눈을 떴는데
냄새도 있고,
숨소리도 있는데.
23/
뭔가가
달랐다.
24/
이불이
눌리고 있었다.
25/
정확히는
이불 위에
뭔가가
올라와 있는 무게감.
26/
무겁진 않았다.
고양이 정도.
아니,
갓난아이 정도.
27/
내 왼쪽.
침대와 벽 사이,
그 좁은 공간에서
이불을 누르고 있었다.
28/
웃음소리가
더 가까워졌다.
29/
아까는
귀 옆이었다.
30/
이번엔
귀 안이었다.
31/
고막 바로 앞.
밖에서 안으로
밀려 들어오는 느낌.
32/
나는
소리를 질렀다.
33/
소리를 지르면
사라질 줄 알았다.
34/
안 사라졌다.
35/
내 비명 사이사이에
후,
후후.
36
마치
내가 소리 지르는 게
재밌다는 것처럼.
37/
그때 알았다.
무서운 것 앞에서는
소리를 질러도
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.
38/
상이
점점
심해졌다.
39/
밤에 깨는 시간이
빨라졌다.
40/
3시에서
2시로.
41/
2시에서
1시로.
42/
잠드는 시간은
늘 비슷했다.
자정쯤.
43/
그러면
잠은
한 시간.
44/
그게
매일이었다.
45/
그리고
웃음소리는
밤에만
나지 않게 됐다.
46/
출근길
버스 안에서.
왼쪽에서
후,
후후.
47/
회사에서
전화 받다가.
후,
후후.
48/
화장실에서
혼자 있을 때.
후,
후후.
49/
하루 종일.
50/
미칠 것 같았다.
51/
아니,
이미
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.
52/
집중이 안 됐다.
머리가
자꾸 비었다.
53/
밥맛이 없었다.
하루 한 끼도
버거웠다.
54/
3주 만에
5킬로가
빠졌다.
55/
그때 확신했다.
이건
밤만 버티면 되는 일이
아니라는 걸.
56/
이쯤 되면
사람은
누군가에게 매달리게 된다.
57/
절에 갔고,
신사에 갔고,
기억나는 곳은 전부 갔다.
58/
돌아오는 말은
늘 같았다.
59/
"괜찮을 거야."
60/
괜찮을 거야.
61/
괜찮을 거야.
62/
그 말은
위로가 아니라
문을 닫는 소리처럼 들렸다.
63/
말을 할수록
사람이 사라졌고,
설명할수록
내가 이상해졌다.
64/
이건
무서운 일을 겪는 게 아니라,
출구 없는 곳에
떨어진 느낌이었다.
65/
그리고
그 감각이
조금씩
익숙해졌다.
66/
그러다
이상한 생각이 들었다.
67/
왜
나만
이렇게 아파야 하지.
68/
이건
한 사람 몫으로는
너무 오래 간다.
69/
그래서
말로 옮기면
조금은
흩어질 줄 알았다.
70/
누군가 읽으면
조금은
내 쪽이 가벼워질 줄 알았다.
71/
그런데
쓰고 나서야
알았다.
72/
이건
사라지는 게 아니라
옮겨 붙는다는 걸.
73/
지금
이 문장을
천천히 읽고 있는 너.
74/
혹시
시간을 한 번
확인했을지도 모른다.
75/
아무 이유 없이
방 안을
의식했을지도 모른다.
76/
방향은
굳이 말하지 않겠다.
77/
이미
알고 있다면
그걸로 충분하다.
78/
괜찮을 거라고
정리하고 있지.
79/
다들
그렇게 말한다.
나한테도
그랬다.
80/
그래서
하나만 말해 둔다.
81/
이 글은
경고가 아니다.
82/
부탁도 아니다.
83/
다만
같은 시간에
같은 문장을
같이 떠올렸을 뿐이다.
84/
저주에는
85/
두 번째 규칙이 있다.
86/
알려고 하지 말 것.
86/
지금처럼.